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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개발원조(ODA)와 새마을운동의 세계화 방안

소진광 교수 (본 학회 회장/가천대학교)

새마을운동은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근대화의 상징처럼 인식되고 있다. 이와 함께 세계의 국제기구와 많은 개발도상국가들이 한국의 새마을운동 경험을 배우고자 노력 중이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의 진정한 가치는 시멘트와 철근 등 투입(input) 대비 마을회관, 마을 도로확장 등 산출(output)이 아니라 마을마다 여건이 다르고, 시대마다 다른 환경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주민들의 역량이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즉,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소득증대나 마을 기반시설 구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를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강화했다는 관점에서 접근되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나라의 성공한 새마을운동 성과는 모든 이해당사자가 공동의 목표를 실천했다는 ‘거버넌스(governance)’구축과 내부 구성원들의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축적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거버넌스’와 ‘사회적 자본’이 한국의 지역사회를 근대화, 효율화하였고, 사회작동체계를 정비하였으며, 발전을 이끄는 ‘확대 재생산’의 동력이 되었다.

국제연합이 2000년 천명한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2015년 다시 제기한 지속가능한 개발목표(SDGs), 혹은 OECD의 개발원조회의(DAC)와 UNDP등에서 델피신전의 신탁처럼 받들고 있는 개발원조 평가지표도 결국 이러한 ‘거버넌스’와 ‘사회적 자본’의 부분요소이고, 의미 확장에 불과하다. 즉, 개발원조회의(DAC)가 시도하고 있는 ‘원조효과성’에서 ‘개발효과성’으로의 전환을 위한 노력도 2002년 로마선언, 2005년 파리선언, 2008년 아크라 행동 계획, 2011년 부산선언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가진 자의 오만’을 벗어나기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새마을운동은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돕는 것도 아니요, 힘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다스리기 위한 수단도 아니었다. 가지지 못한 사람들끼리의 공동노력이었고, 힘없는 사람들의 실천을 통해 힘을 키웠기에 어느 일부를 빼서 다른 곳에 보태는 과정이 아니라 전체의 몫을 키울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새마을운동을 다른 개발도상국에 적용하는 것은 이제까지의 공적개발원조 방식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지니고 있다.

공적개발원조의 필요성과 정당성은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된다. 우선 공적개발원조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공적개발원조는 서로 맞물려 있는 국제시장에서 부(wealth)의 편중을 초래하는 불공정 거래를 시정할 필요성에서 정당화 된다. 즉, 기술과 노동력의 가치가 국제관계에서 정당하게 다루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부의 편중 즉, 잘 살고 못사는 나라끼리의 수준은 공적개발원조를 통해 보정되어야 한다는 논리이다. 재화의 생산과 소비가 다른 공간에서 이루어질 경우 이러한 경우가 발생한다. 선진국의 생산활동은 다양한 투입요소를 필요로 하는데, 특히 후진국으로부터의 투입요소 가격은 낮게 책정되고, 반대로 생산된 재화가 후진국 시장에서 거래되는 가격은 높게 책정되기 쉽다. 경제적인 측면의 둘째는 잘 살고 못사는 이유가 과거 식민지배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이다. 오늘날 잘사는 나라의 대부분은 과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활용한 경험이 많다. 또한 오늘날 못사는 나라의 대부분은 과거 다른 나라로부터 식민지배를 받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다. 결국 식민지배관계로 인해 나라끼리의 부의 편중이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과거 다른 나라를 식민지로 관리함으로써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국가들은 식민지배로 인해 못살게 된 나라들을 도와야 한다.

다른 한편 환경적인 측면에서 공적개발원조의 정당성이 제기될 수 있다. 즉, 지구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해법에서 공적개발원조의 정당성은 인정된다. 오늘날 잘 살게 된 나라의 대부분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값싼 에너지를 사용한 덕분이다. 그 결과 지구환경은 위험수준에 이르렀고, 더 이상의 화석연료 사용이 인류 전체에 이롭지 않게 되었다. 그동안 산업화를 미뤄왔던 국가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잘살게 된 나라들이 만든 지구환경오염으로 인해 미래 같은 행동지침을 강요받는다는 것은 결코 온당치 못한 해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못사는 나라들이 비용이 많이 드는 신재생 에너지를 활용하기도 어렵다. 따라서 결자해지(結者解之)의 방식으로 이미 지구환경을 위험수준으로 오염시키면서 잘 살게 된 나라들이 같은 방식으로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한 개발도상국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적개발원조의 정당성은 인도주의 입장에서 정당화 된다.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남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리지 못한다면 세상을 이끌기도 어렵다. 또한 다양한 세상이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 모두 부자들만 살고, 힘 있는 자들만 살아남았다고 가정하면 세상은 평화롭지 못할 것이다. 즉, 다양성의 조화는 평화 공존의 근본전제이다. 공적개발원조가 이러한 다양성의 조화를 이루는 조정장치인 셈이다. 가장 인간적인 것은 서로 다른 데서 찾을 수 있다. 서로 다른 현실은 조정되지 못하면 조화에 이르지 못한다. 결국 인도주위 입장도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수단이다. 힘이 넘치면 힘없는 사람을 도와야 하고, 식량이 넘치면 굶는 사람을 도와야 한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앞서서 잘 사는 나라도 아니었다. 구태여 남을 짓밟아 일어선 나라도 아니다. 결코 다른 나라를 식민지배한 적도 없다. 그렇다고 지구환경을 크게 오염시키면서 산업화를 일군 나라도 아니다. 오히려 외제라면 사족을 못쓰고 웃돈까지 주면서 갖기를 원했고, 강대국의 식민지배로 자원까지 수탈당했으며, 산업화 초기 외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공해업소가 들어왔다. 모두 우리의 슬픈 역사에 포함되어 있는 사실들이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슬픈 조각들을 달리 조작하여 새로운 기운을 얻었고, 과거와 미래를 단절하고픈 마음으로 현재를 힘들게 바꾸었다. 해방 이후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의 하나였던 우리의 과거가 찬란하게 조명될 수 있는 것은 바로 과거와 미래를 단절하고자 했던 그 시대의 주인공들 덕분이다. 따라서 우리가 다른 나라를 도와야 하는 이유는 인도주의 입장에서만 정당화 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지구상에서 가장 인도주의적인 나라는 우리 대한민국뿐이다. 잘 살고 못 살기 때문에 조정되어야 할 다양성의 조화도 여러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못 사는 나라에서 잘 사는 나라로 전환한 대표적인 국가이다. 따라서 우리보다 잘 살았지만 현재는 어려운 국가, 우리와 함께 못 살았고, 현재도 못 사는 나라를 대한민국이 도와주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현재 못 사는 다른 나라를 돕는 것은 ‘용기’와 ‘희망’을 심기 위한 것이지 우리가 현재 잘 살고 있음을 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많은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에 공적개발원조를 제공하고 있다. 공적개발원조가 의무감에서 혹은 국가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공적개발원조가 가진 자의 논리로 접근되고 있다.

따라서 새마을운동방식으로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일이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히 ‘가진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를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로 전환할 수 있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마을운동의 세계화는 이제까지의 공적개발원조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새마을운동의 성과는 ‘갖게 된 나라의 오만’이 아니라 ‘가지지 못한 나라’가 ‘가진 나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새마을운동을 세계화한답시고 다른 선진국들의 공적개발원조방식을 모방한다면 우리의 소중한 경험을 다른 선진국의 잣대로 값싸게 할인받는 꼴이 될 것이다. 다른 개발도상국에 새마을운동 경험을 전파하는 일에 기왕의 공적개발원조방식만을 적용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