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화의 영향과 IMF 경제위기의 충격으로, 중앙정부에 의해 입안·시행되었던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이 중단되었고, 국토종합(개발)계획도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과거 국가에 의해 추진되었던 이러한 사회경제적·공간적 계획은 경제성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계획이었고 중앙집권적 독재정권에 의해 강제된 하향식 계획이었다는 점 등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도권 집중과 지역불균등은 더욱 심화되었고, 대도시들의 주거, 교통, 환경 문제 등도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국가의 합리적 계획 및 조정 기능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2000년대 이후에도 다양한 성향의 정부들은 내용과 방식에 있어서 많은 차이는 있었지만 사회경제 및 국토·도시지역 계획을 추진했다. 예로 노무현 정부에서는 지역균형발전을 핵심적 정책과제로 설정하고, 행정중심복합도시(현 세종시), 혁신도시, 기업도시 계획, 그리고 후반부에는 마을만들기 사업 등을 추진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에서는 4대강사업과 해외자원 개발을 강행했고, 저탄소녹색도시를 도시 발전의 목표로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는 창조경제를 국정 핵심 기조로 제시했고, 이와 관련된 창조도시에 대한 관심도 고조시켰다.
그러나 역대 정부의 이러한 정책들은 연속성을 가지지 못했고, 다음 정부가 들어서면 급격하게 바뀌어 버렸다. 물론 어떤 정부가 시행했던 정책 기조와 그 효과가 부정적이라면 당연히 중단되고, 다른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종합적 계획(planning)을 포기하고 사안별 프로젝트(project)로 전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국토 및 도시지역 계획과 이에 따른 공간구조의 재편은 장기적이고 복합적인 효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계획은 근본적으로 절차적 및 실체적 합리성에 따라 입안되고, 어떤 정부가 들어서더라도 그 기조를 지속시키는 범위 내에서 유연하게 시행되어야 한다.
이번 대통령 후보자들이 제안한 선거공약이나 정책과제들을 살펴보면, 새로운 정부에서도 어떤 일관된 국토 및 도시지역 계획이 추진되기는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앞선 정부의 창조경제 정책이 실제 아무런 내용이 없는 수사에 불과했고, 따라서 대안적 계획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로 ‘4차 산업혁명’은 실속이 없는 구호처럼 들리고, 이를 전제로 한 경제 및 국토 계획은 기존의 정보통신기술을 좀 더 발전시키고, 스마트도시 또는 인텔리전트 도시로 지칭되는 도시 발전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정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의 정책 기조가 우리 경제와 국토 공간 전체를 규정하는 기본 원칙이 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으로 되돌아가서 국토 및 도시지역 계획의 원칙 또는 기조를 재구성해 보아야 한다. 첫째, 모든 부문의 정책들이 그러하듯이, 국토 및 도시지역 정책은 사람의 삶과 복지를 위한 정책이어야 한다. 경기 부양이나 경제성장을 추동하는 데 우선 목적을 둔 정책은 비록 침체된 도시나 지역의 경제를 활성화시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주민들의 노동과 일상생활(소비와 여가생활 등)을 경제성장에 필요한 수단으로 동원하고, 결국 사람들의 삶을 더욱 고단하게 만든다. 예로 물질적 부의 증대와 의료기술의 발달로 수명이 다소 늘겠지만, 고령화와 저출산에 따른 도시지역문제는 해결되기 어렵다.
최근 우리 경제에서 나타나는 저성장 경향은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 과정에 내재된 원인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저성장 경제에서 과거와 같은 고성장 경제로의 복귀를 위한 계획이 아니라 저성장 경제 속에서 실질적으로 지역경제의 활성화와 주민 생활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정부(중앙 및 지방)는 기업주의적 도시전략이나 선전주의에서 벗어나 도시나 지역의 실질적인 내수시장 활성화와 이를 통한 일자리 창출 및 소득 증대, 그리고 주거, 교육, 보건의료 등의 복지정책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해야 한다.
둘째, 국토 및 도시지역 정책은 자원과 환경에 더 많은 그리고 진정한 관심을 두고 생태적 공생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 동안 급속한 산업화·도시화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을 소모하고 공해물질들을 배출했으며, 이로 인해 자연은 파괴되고, 가용자원은 점차 고갈되었으며 환경오염도 누적적으로 심화되었음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 동안 환경관련 정책은 심화된 환경문제들을 일시적으로 완화하거나, 심지어 환경문제를 명분으로 엄청난 재정이 투입되는 국가적 토건사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로 4대강사업으로 인해 수질오염은 더욱 심화되었고, 미세먼지로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될 정도로 대기의 질도 악화되었다.
1990년대 이후 환경정책의 주요 기조가 되었던 지속가능한 발전의 개념은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사회환경적 정의의 관점에서 인간 사회와 자연 환경 간의 생태적 관계를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개념은 실제로는 환경관리 기술개발 정책을 통해 경제성장을 지속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명박 정부에 와서는 왜곡되거나 정책적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제부터라도 진정한 의미로 국가 및 도시와 지역이 한정된 생태적 범위 내에서 자연과 공생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발전이 추구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예로 도시 공간 정비와 미화에 초점을 둔 도시재생 사업보다는 도시의 생태공동체 의식과 실천을 고양시킬 수 있는 정책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국토 및 도시지역 정책은 국토균형발전을 지향해야 한다. 특정 도시나 지역에 인구와 산업이 지나치게 집중·집적할 경우, 이로 인해 주거·교통·환경문제 등 집적의 불이익이 발생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인구가 과소하고 산업이 저발전한 지역들은 그 지역의 발전 잠재력을 실현하기 어렵고, 이로 인해 국토 공간 활용의 비효율성이 초래된다. 지역불균등발전은 한정된 자본이나 재정의 선택적 집중에 의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간주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국가의 균형발전 의지와 이를 반영한 계획을 통해 분명 완화될 수 있다.
국토균형발전 정책은 물론 세계화 시대에 부응하는 도시 발전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모든 도시나 지역들이 동일한 산업과 인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초거대 도시지역의 발전은 일극 체제의 국토 공간구조를 심화시키고, 이로 인해 국토공간의 비효율성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네트워크-도시’모형에서 제시되는 다중심적 광역지역 발전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즉 국토공간을 수도권에 준하는 몇 개의 광역권으로 편성하고, 각 광역권 내에 서울에 버금갈 권한을 가지는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분산적이고 수평적인 도시체계를 육성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수 있다.
넷째, 국토 및 도시지역 정책은 도시 및 지역들 간 협력과 상호보완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연계성 확충에 바탕을 두고 사회공간적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국가균형발전 정책은 균형의 원칙을 적극 반영했다고 할지라도, 사회공간적 협력과 통합의 측면을 거의 무시했다는 한계를 가진다. 즉 당시 정책은 수도권과 비수도권을 이분화했을 뿐 아니라 지방에 분산되는 새로운 도시기능들이 해당 도시나 지역사회에 뿌리내림을 촉진할 수 있는 방안을 무시했고 또한 기능이 분산된 지방들 간 연계성에 대해서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방에 분산된 기능들은 거의 모두 다시 서울의 중추기능에 종속되게 되었다.
국가의 사회공간적 통합은 단순한 균등화에서 나아가 적극적인 상호연계와 이에 따른 협력과 상호보완성 증대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그 동안 경제·정치적 분산 및 분권 정책들이 제대로 시행될 수 없었던 것은 개별 도시나 지역으로의 분산과 분권을 전제로 했지만, 이로 인해 도시와 지역들 간 경쟁은 더욱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도시나 지역들은 경제·정치적 역량이 수도권에 비해 턱없이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개별 도시나 지역의 내적 역량을 밑에서부터 강화하는 한편 도시나 지역들 간 연계성을 강화하여 광역권 협치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국토 및 도시지역 정책과 관련하여 이상에서 제시된 4가지 기조들, 즉 복지, 생태, 균형, 연계의 원칙들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4가지 가치를 반영한 국토공간 또는 도시지역체계는 ‘복지생태도시들의 다중심적 네트워크’로 지칭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정책 기조들과 전망은 세부적 방안들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국민과 지역주민들, 그리고 특히 지역발전 연구자들은 이러한 원칙이나 이를 반영한 지역발전 정책들이 경제적 부와 정치 권력의 사회공간적 불균등 배분을 정당화시키는 명분으로 왜곡되지 않도록 계속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