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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지역개발 우수사례

성수동 소셜벤처 밸리

김묵한(서울연구원 연구위원)

최근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 중에 주목받는 것으로 공유가치창출(Creating Shared Value: CSV) 전략이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교수인 포터는 동료인 크레이머와 함께 흔히 생각하는 바와는 달리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가 꼭 충돌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이 두 가치를 포용하는 공유가치를 찾는 것이 가능하고 이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기업과 사회의 공동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들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2006년 발표한 ‘전략과 사회: 경쟁우위와 CSR 간의 연결(Strategy and Society: The Link between Competitive Advantage and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에서 처음 CSV의 개념을 정립하였고, 5년 후인 2011년 ‘공유가치를 창출하라: 자본주의를 재창조하는 방법과 혁신 및 성장의 흐름을 창출하는 방법(Creating Shared Value: How to Reinvent Capitalism ? Unleash a Wave of Innovation and Growth)’이라는 논문에서 CSV의 개념을 확장하여 전략으로 공식화 하였다.

과연 CSV가 저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추진될 수 있는 가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비난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성공’을 ‘사회/공동체의 번영’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으며, 기업 이윤의 일부를 사회공헌에 쓰는 방식에서 기업 활동 자체를 사회적 가치와 경제적 수익을 동시에 추구하는 전략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CSV의 기본 아이디어는 학계뿐 아니라 기업, 사회운동계에서도 큰 관심을 끌었고, 실제 기관과 기업의 사업으로도 널리 받아들여져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성공사례를 낳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주목할만한 점은 포터와 크레이머가 CSV의 전략을 전개함에 있어 기업 내부에서의 전략뿐만 아니라 기업 외부에서의 공간 전략을 함께 권장했다는 데에 있다. CSV의 창출을 위해 이들은 특히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사회적 요구를 지속적으로 탐색해 상품과 시장을 다시 조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 다음은 기업의 가치사슬을 재점검하고 여기서 비용을 증가시키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또 하나의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마지막으로 이들은 이런 두 가지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공동체로서의 지역 클러스터를 개발하라고 주장한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포터와 크레이머에게 지역 클러스터는 무엇보다 CSV의 기회를 극대화할 수 있는 공간적 제도이며, 특히 이들은 기업과 협력업체 뿐만 아니라 정부와 NGO등이 함께 협력하는 형태의 지역 클러스터를 가장 이상적인 CSV의 공간으로 보았다.

하지만 공유가치를 찾고, 가치사슬을 조정하는 일과는 달리 일개 기업이 클러스터를 꾸리기는 절대 손쉬운 일이 아니다. 라스베가스 구 도심에 자리잡은 다운타운 프로젝트와 같이 인상적인 사례가 있으니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운타운 프로젝트를 이끄는 것이 미국 최대 온라인 신발쇼핑몰 자포스와 그 창업자 토니 셰이라는 점을 되새겨보면 현실적으로 포터와 크레이머가 말하는 클러스터를 만들 수 있는 기업은 없지는 않으나 매우 예외적인 사례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히려 이와 반대의 사례를 찾기가 보다 쉬울 수 있다. 포터와 크레이머가 제안한 전략을 꼭 순서대로 추진할 이유는 없다는 의미이다. 인공적이 아닌 자연적인 CSV 클러스터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혹은 하나의 기업이 아니라 여러 기업과 기관이 동시다발적으로 클러스터를 이루고 이를 기반삼아 CSV 전략을 추구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이 경우 정책의 핵심은 신규 클러스터의 조성 보다는 기존 클러스터의 발굴과 활용,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지원정책 시행으로 옮겨가게 될 것이다. 다행이도 이런 사례를 찾기 위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최근 사회적 경제의 새로운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는 서울의 성수동은 자연스럽게, 관 주도의 프로그램없이도 CSV 클러스터의 씨앗을 품고 발전해온 곳으로, 최근에는 ‘성수 소셜벤처 밸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을 정도로 흥미로운 지역으로 부상하고 있다.

성수동은 원래 ‘성수공단’이라는 별칭으로 제법 알려져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미 20여 년 전 1995년에 공업단지라는 용어가 산입법 개정과 함께 산업단지라는 용어로 바뀌었으니, 성수‘공단’이라는 말이 그 이전에 생겼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성수동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그러니까 현재 서울온수산업단지의 전신인 영등포 기계공업공단과 국가산업단지인 한국수출산업공단이 모양을 갖출 때 쯤, 이들과 함께 서울시 제조업의 공간인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실제 공단이 아니었던 성수동이 어쩌다 ‘성수공단’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는지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구로구에 있었던 한국수출산업공단은 이미 ‘구로공단’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상황이었고, 구로공단과 비슷한 제조업 경관을 가지고 있었던 성수동 준공업지역 일대도 이를 따라 ‘성수공단’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초기에 성수동은 우리나라의 수출산업의 한 거점을 담당하였으나, 이후 점차 서울시에 고유한 이른바 도심형 제조업이 모여드는 형태로 변해갔다. 1960년대 철공장, 염색공장에서 시작하여 이후 70년대, 80년대에는 가발, 봉제 공장이 모여들었었고, 1990년대 이후에는 인쇄와 함께 구두관련 공장이 모여들었다. 성수동은 원래 일제강점기부터 대형 창고가 많이 있었던 지역이었는데, 이후 입주 산업이 변화하면서 공장이 점차 영세화, 소형화됨에 따라 지금과 같이 대형 블록 안에 소규모 업체가 빼곡하게 들어찬 독특한 가로 형태를 보이게 되었다.

성수공단의 위기는 1990년대 말 IMF 사태라 말했던 외환 위기와 함께 찾아왔다. 전반적인 제조업 경기 하락은 서울시도 빗겨가지 않았고, 이런 경기 하락은 서울시 제조업의 공간이었던 준공업지역에서의 쇠락으로 극명하게 드러났다. 수많은 공장이 문을 닫았고 남아있는 공장들도 보다 저렴한 생산지를 찾아 준공업지역을 떠났다. 예전의 점진적인 변화와는 다른 급격한 변신이 강요되던 불황의 시절이었다.

2000년대 들어 비슷한 상황이었던 구로공단은 IT 첨단 산업단지로 산업구조를 극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고, 변화 과정에서 아파트형 공장으로 대비되는 새로운 산업단지 및 도시개발 모형을 보여주었다. 성수공단에 구로공단 모형을 도입하려고 했던 시도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건물 단위에서는 일부 성공적이었으나 구로공단과 같은 전반적인 지역의 변화를 가져오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게 2000년대 성수동은 위기를 넘기고 남아있던 제조업과 아직 제자리를 찾지 못한 신생 IT가 샐러드처럼 서로 섞여 다양하나 딱히 역동적이지는 않은 평형점에 도달한 듯 했다.

하지만 성수공단의 잠재력은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나타났다. IT가 아니라 구두, 보다 정확하게는 수제화 산업이 지역산업의 형태로 새로운 추진력을 얻었던 것이다. 2000년대 말 성수동 일대 구두 사업자들은 서울시 내 수제화 공방 대부분이 이 지역에 남아있다는 데 착안하여 서울성동제화협회를 창립한다. 이들은 생산공장의 한계를 넘기 위해 지역 수준의 사업을 지속적으로 제안하였고, 서울시는 이를 받아들여 2012년 성수역 인근을 수제화산업특화지역으로 지정하면서 산업육성을 위해 공동 브랜드(SSST, 서울 성수 수제화 타운), 공동매장, 수제화 박물관, 기념 상징물 등의 사업을 지원하였다. 아직 사업의 성패를 논하기는 이르지만 적어도 수제화 산업관련 사업이 성수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새로운 산업 도입이 아닌 기존 산업의 강화를 통한 재생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를 제기하는 의견은 찾아보기 어렵다.

CSV 클러스터, 혹은 이른바 소셜벤처 밸리와 관련한 움직임은 이러한 활력과 궤를 같이한다. 사실 산업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았던 2000년대였지만 성수동 거주 및 근무환경에는 큰 의미가 있는 일이 2005년에 있었다. 바로 뚝섬역 인근 서울숲의 개장이었다. 이후 분당선 서울숲역이 운행을 시작한 2012년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가 인근으로 옮겨온 것을 시작으로 서울숲 조성과 관련이 깊은 그린트러스트 등 사회적 경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기관과 기업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오기 시작했고, 작년에는 지역 기관들이 모여 사회적기업과 혁신가를 지원하는 비영릴 사단법인인 루트임팩트를 중심으로 ‘서울숲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서울숲 인근 성수동을 비영리단체, 사회적 기업, 지역 소상공인,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사회적 도시를 개발하자는 기획을 진행하고 있다. 전형적인 CSV의 클러스터 전략이 자발적으로 추진되는 형국인 것이다. 현재 이 지역에는 20여개 이상의 사회적기업과 비영리단체가 모여있으며, 루트임팩트를 비롯하여 임팩트스퀘어, 소풍 등의 기관이 적극적으로 사회적 기업가를 불러모으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적 기업가들 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활동가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 또한 성수동에 차례차례 자리잡고 있다. 1970년대까지 정미소였던 성수역 인근의 대림창고는 패션쇼와 전시 행사가 끊이지 않는 쇼룸으로 거듭났다. 소셜벤처 육성기업인 소풍은 예비창업가들 누구나 와서 협업할 수 있는 공간인 코워킹(협업) 카페 ‘카우앤독(CoW&DoG)’을 서울숲역 인근에 운영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차량공유기업 쏘카, 크라우드 펀딩 업체 텀블벅 등에 투자와 인큐베이팅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벤처 1세대 들이 만든 벤처자선기관 ‘C프로그램’ 또한 이곳에 입주해 있다. 루트임팩트는 사회적 기업가의 공동체 주택이자 커뮤니티 공간인 ‘디웰(D-Well)’을 역시 인근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에서 글로벌 대학생 비영리단체 인액터스, 부모학교 자람패밀리, 청년 비영디단체 아프리카인사이트 등을 입주시켜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카페, 예술가, 디자이너 등이 모여들면서 이 지역은 명실공히 소셜벤처를 지원하는 지역공동체로서 정체성을 확립해가고 있다. 최근에 서울시도 성수동의 잠재력을 높이 평가하고 지역 맞춤형 도시재생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올해 4월 성수동 중소기업종합지원센터 내에 성수 도시재생지원센터를 개소하기도 하였다.

뜨는 동네에는 별명이 붙기 마련이다. 성수동은 최근 ‘성수 소셜벤처 밸리’라는 별명 외에도 ‘제2의 경리단길’, ‘서울의 브루클린’과 같은 별명 또한 가지게 되었다. 이런 별명은 이 지역에 있는 활동가들의 가장 큰 걱정을 암암리에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혹시나 소셜벤처 밸리가 채 무르익기도 전에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한 임대료 상승으로 인해 소셜벤처 밸리가 내파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 말이다. 어쩌면 이 지역은 드디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사회적 기업과 소셜벤처 기업가를 불러들이려는 산발적인 노력의 집합적인 결과로 나타났다면, 이제는 그야말로 지역의 공유가치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지역내 기업 및 기관간 가치사슬을 어떻게 맺어가야 하는 지 실로 지역 공동체적인 시각에서 성수동의 미래를 같이 만들어가야 할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형국이다.

성수동이, 성수동에 자리잡은 이들이 과연 이러한 시험을 넘어 지속가능한 성수 소셜벤처 밸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예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CSV 클러스터로서 성수동의 진화를 계속 탐색하고 알아가야 할 가장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수동의 다음과 다른 성수동을 전망하며 이 글과 같이 현재를 기록하고 나누어야 할 이유가.